(이미지 출처 : 한지혜 미니홈피)

배우 한지혜는 28일 오후 11시 30분께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옛 연인 이동건의 남동생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고인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날 한지혜는 영정을 보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

한지혜는 이동건과 특별한 대화 없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갔으며, 한 측근에 따르면 "예전 한지혜와 이동건의 동생이 친남매처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번 사고로 한지혜도 큰 충격을 받았다" 고 전했다.

또한 한지혜는 31일 서울 대치2동 성당에서 진행된 이동건 동생의 영결미사에 참석했으며, 한지혜의 미니홈피에는 "힘내요 당신" 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어 일각에서는 옛 연인인 이동건에게 "힘내라" 는 위로가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동건의 친동생은 지난 21일 호주 시드니 도심에서 중국계 갱단으로 추정되는 20대들에 의해 피살됐다. 사망 사고 소식을 접한 이동건은 지난 21일 호주로 출국해 조용히 가족들과 법적 절차를 밟은 뒤 26일 고인이 공부하던 시드니대학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해 동생의 명복을 빌었다.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한지혜를 비롯해 조현재, 오대규, 김흥수, 김지훈, 개그맨 윤택 등이 조문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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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한지혜의 미니홈피 글귀가 네티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지혜가 미니홈피의 메인에 올린 ‘힘내요 당신’이라는 글귀 때문. 팬들 사이에서는 이 메시지가 ‘옛 연인 이동건을 응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그러나 한지혜가 메시지의 등록일자는 2007년 11월이여서 이번 이동건 동생 사망사건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두 사람은 올해초 오랜 공개연애끝에 결별하면서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이동건의 동생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한지혜는 28일 삼성병원에 차려진 빈소에 이어 장례미사까지 참석해 이동건을 위로하며 동료애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지혜를 비롯해 가족과 친지 등이 참석한 장례미사 후, 고인의 유해는 서울 흑석동의 한 성당에 안치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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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닷컴 | 뉴스편집팀] "힘내요 당신"


한지혜가 친동생을 잃은 옛 여인 이동건에게 격려의 메세지를 전해 눈길을 끈다.

한지혜는 자신의 미니홈피 스토리 룸에 "힘내요 당신" 이라는 글을 남겨 슬픔에 빠진 이동건에게 직간접적으로 힘을 주는 모습을 보였다.

한지혜는 지난 28일 오후 11시 30분쯤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동건 동생 빈소를 찾아 이동건을 위로하고 님동생의 영정을 보고 울음을 터트려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한지혜는 이동건 동생과 생전에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동건의 동생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새벽 1시쯤 호주 도심에서 중국계 남자 2명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동생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동건은 현지에서 사건을 수습한 뒤 28일 오후 6시 동생의 유해와 함꼐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사진=한지혜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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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한지혜가 미니홈피의 메인에 올린 ‘힘내요 당신’란 글귀가 공교롭게도 옛 연인 이동건의 남동생 장례와 맞물려 네티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사실 ‘힘내요 당신'란 메시지는 2007년 11월께 올려 있던 글로 동생을 잃은 이동건에게 격려성으로 쓴 글은 전혀 아닌 것.

그러함에도 한지혜가 지난 28일 이동건의 남동생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고인의 가족들을 위로한데 이어  31일 서울 대치2동 성당에서 진행된 영결미사에 참석하자 이 메시지와 연관시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다시 재회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네티즌들의 바램인지도 모른다.

한지혜가 이동건 동생 빈소에서 그의 영정을 바라보며 오열한 것도, 한 젊은이가 해외에서 어처구니 없는 죽음으로 고국에 돌아온 것 등도 너무 안타깝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동건의 남동생은 지난 21일 호주 시드니 도심에서 중국계 갱단에 속해 있는 10대 남성 2명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사망했다.

디지털뉴스팀 newsinf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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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한지혜 미니홈피)

배우 한지혜는 28일 오후 11시 30분께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옛 연인 이동건의 남동생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고인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날 한지혜는 영정을 보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

한지혜는 이동건과 특별한 대화 없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갔으며, 한 측근에 따르면 "예전 한지혜와 이동건의 동생이 친남매처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번 사고로 한지혜도 큰 충격을 받았다" 고 전했다.

또한 한지혜는 31일 서울 대치2동 성당에서 진행된 이동건 동생의 영결미사에 참석했으며, 한지혜의 미니홈피에는 "힘내요 당신" 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어 일각에서는 옛 연인인 이동건에게 "힘내라" 는 위로가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동건의 친동생은 지난 21일 호주 시드니 도심에서 중국계 갱단으로 추정되는 20대들에 의해 피살됐다. 사망 사고 소식을 접한 이동건은 지난 21일 호주로 출국해 조용히 가족들과 법적 절차를 밟은 뒤 26일 고인이 공부하던 시드니대학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해 동생의 명복을 빌었다.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한지혜를 비롯해 조현재, 오대규, 김흥수, 김지훈, 개그맨 윤택 등이 조문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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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한지혜 미니홈피)

배우 한지혜는 28일 오후 11시 30분께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옛 연인 이동건의 남동생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고인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날 한지혜는 영정을 보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

한지혜는 이동건과 특별한 대화 없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갔으며, 한 측근에 따르면 "예전 한지혜와 이동건의 동생이 친남매처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번 사고로 한지혜도 큰 충격을 받았다" 고 전했다.

또한 한지혜는 31일 서울 대치2동 성당에서 진행된 이동건 동생의 영결미사에 참석했으며, 한지혜의 미니홈피에는 "힘내요 당신" 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어 일각에서는 옛 연인인 이동건에게 "힘내라" 는 위로가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동건의 친동생은 지난 21일 호주 시드니 도심에서 중국계 갱단으로 추정되는 20대들에 의해 피살됐다. 사망 사고 소식을 접한 이동건은 지난 21일 호주로 출국해 조용히 가족들과 법적 절차를 밟은 뒤 26일 고인이 공부하던 시드니대학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해 동생의 명복을 빌었다.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한지혜를 비롯해 조현재, 오대규, 김흥수, 김지훈, 개그맨 윤택 등이 조문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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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한지혜의 미니홈피 글귀가 네티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지혜가 미니홈피의 메인에 올린 ‘힘내요 당신’이라는 글귀 때문. 팬들 사이에서는 이 메시지가 ‘옛 연인 이동건을 응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그러나 한지혜가 메시지의 등록일자는 2007년 11월이여서 이번 이동건 동생 사망사건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두 사람은 올해초 오랜 공개연애끝에 결별하면서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이동건의 동생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한지혜는 28일 삼성병원에 차려진 빈소에 이어 장례미사까지 참석해 이동건을 위로하며 동료애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지혜를 비롯해 가족과 친지 등이 참석한 장례미사 후, 고인의 유해는 서울 흑석동의 한 성당에 안치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지혜, 이동건 동생 빈소 찾아 끝내 눈물 한지혜, "잔머리로 못생긴 이마가 컴플렉스" 한지혜 “이천희, 키스신 찍다 좋아한다 고백하더라” 연예계 공식 커플, 이동건-한지혜 결별소식에 이동건 미니홈피 찾기 한지혜 3남매 사진, 네티즌들 관심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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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 백령문화관 … 공군 군악대와 합동 연주

백령윈드오케스트라(단장:노성규스포츠과학부교수) 제14회 정기연주회가 22일 오후 7시30분 강원대 백령문화관에서 열린다.

강원대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백령문화관이 주최하는 이날 연주회는 공군 군수사령부 군악대와 함께하는 합동 연주회여서 눈길을 끈다.

백령윈드오케스트라 출신인 공군 군수사령부 군악대장 김희강 소령이 이끄는 브라스밴드가 함께 무대에 오른다.

강원대 음악학과 이한돈 교수와 김희강 소령이 지휘봉을 잡으며 국내 가곡부터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 영화OST를 힘과 에너지가 넘치는 군음악과 화려하고 진취적인 대학음악의 하모니로 ‘내 마음의 강물’ ‘산촌’ ‘Sabre dance’ ‘Shall we dance’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중 ‘무제타의 왈츠’ 모차르트 오페라 피카로의 결혼 중 ‘이제는 날 수 없네’등을 들려준다.

소프라노 강병임, 바리톤 조용원, 호른 이주희, 색소폰 한진현씨가 출연해 협연하는 등 모교 출신 음악인들의 무대도 마련된다.

또 스포츠댄서 함서정 김현우씨의 스페셜 게스트 무대도 마련돼 있다.

지난 1994년 창단된 백령윈드오케스트라는 음악을 사랑하는 강원대 교직원과 재학생들로 구성된 순수 관악연주단이라는 점에서 전국의 대학에서도 보기 드문 연주단체.

매년 교내 행사 연주 등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1998년 ‘제22회 전국대학생음악경연대회’ 대상 1999년 ‘제23회 전국대학생음악경연대회’ 금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백령윈드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이한돈 교수는 “78명의 단원이 오르는 대규모 음악회인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겠다”며 “시민과 강원대 가족들이 힘 있고 신나는 관악연주를 들으며 활력을 느낄 수 있는 무대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했다.

차경진기자 ancha@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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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김두호] 연예인의 활동을 소개하고 연예관련 뉴스나 정보를 다루는 매체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대중 월간 잡지로부터 유래된다. ‘아리랑’ ‘명랑’ 등이 이를테면 성공한 대표적인 초기 연예 잡지의 이름들이다. 그후 주로 영화 음악잡지를 비롯해 여성월간지와 청소년 학생잡지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연예기사들이 잡지의 주요 컨텐츠가 됐다.

1960년대 말부터는 주간지들이 연예매체의 중심에 섰고, 1980년대 중반부터 스포츠 연예 일간지들이 연예정보의 붐을 이끌었다. 또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연예기사를 외면했던 종합일간지들까지 지면을 대폭 할애해 왔고 지금은 인터넷 매체까지 포함, 연예기사가 젊은 독자(네티즌)층의 가장 인기있는 컨텐츠로 떠올랐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각종 연예 정보의 바다에서 떠다니고 있다. 연예정보의 주인공은 연예인들이다. 모든 젊은이들의 꿈과 생활 속에 연예인이 있다. 이를테면 스타라는 것도 그들이 만들어낸다. 연예 매체는 그들 젊은이들이 좋아하고, 궁금해 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 연예인을 주로 소개하거나 활동 정보를 알려준다.

우리 연예 인물사를 돌아보면 ‘톱스타’란 말과 ‘트로이카’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경쟁자가 없는 정상의 스타라는 의미를 ‘톱스타’에 부여한다면 여자 연예인 중에 그 칭호를 붙일만한 인물은 없었다. ‘트로이카’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름 앞머리에 톱스타를 올려도 손색이 없는 배우(또는 가수)라면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의 탁월한 활동 능력, 작품의 관객반응과 평가, 경쟁 영화제 등에서의 수상 경력 등을 통해 자타가 인정할 만한 정상의 위치에 올라야 한다. 지금은 톱스타보다 ‘국민배우’‘국민가수’라는 말이 출현했지만 모두가 매체에서 만들어낸 거품이 들어 있다. 그렇게 부른다고 나쁠 것은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비슷한 수준의 다른 경쟁자들에게는 불공정하고 비위를 상하게 하는 말이다.


인기 있는 사람을 ‘스타’로 부른 것은 ‘실락원’의 시인 밀턴이 가장 먼저였다는 설도 있지만 지금은 분야를 안가리고 스프츠맨이나 정치인도 유명해지면 ‘스타’로 부른다. 우리나라의 ‘스타’ 유래는 은막에서 시작되었고, 여배우 스타 1호는 1923년 개봉된 윤백남감독의 ‘월하의 맹세’의 이월하로 꼽힌다. 매우 섹슈얼한 몸매와 교태 넘치는 얼굴로 당시 영화팬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인물이다.

무성영화시대를 지나 1950년대 이후부터 그야말로 별처럼 많은 스타들이 나타나고 사라져 갔다. 황정순 조미령 이민자 윤인자 노경희 전옥 이빈화 김혜정 최지희 주증녀 이경희 도금봉 문정숙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 태현실 등이 모두 스타소리를 들었고 작품이 히트하면 톱스타 소리를 들었다. 그들 중에 최은희나 김지미 엄앵란 등의 배우들이 이름 앞에 ‘톱스타’란 칭호를 달고 다녔으나 누구도 군계일학으로는 볼 수 없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에는 최은희 김지미를 비롯해 주증녀 문정숙 등이 스타시스템을 주도 했고 , 후반기 청춘영화 바람을 타고 말 그대로 톱스타였던 신성일과 그의 콤비로 엄앵란의 인기가 절정을 누렸다. 그 열기가 실제 사랑으로 이어져 ‘남녀 톱스타의 결혼’이라는 화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즐겁게 만들었다. 이 무렵 신성일에 대한 ‘톱스타’의 칭호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었지만 엄앵란은 경쟁관계의 선후배와 또래 스타들이 더러 있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 등의 등장과 함께 처음으로 트로이카라는 말이 등장했다. 트로이카 1세대로 꼽는 이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데뷔해 나이 출연경력 연기성향 등에서 치열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갯마을’로 떠오른 고은아도 있었고 김지미 엄앵란 문정숙 최지희 태현실 김혜정 도금봉 전계현 등 선배들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지만 한창 물오른 청춘배우로 고만고만한 세 여배우의 등장은 트로이카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받아들여졌다. 러시아말로 3두마차(썰매)를 뜻하는 ‘트로이카’란 말은 연예기자들이 만들어서 띄운 이름이다. 경쟁을 부추기고 눈길을 모으게 하는 말로 매우 재미있고 신선한 용어였다.

1세대 트로이카의 활동시기는 연간 제작편수가 2백여편이 넘는 우리 영화 최전성기 였다. 문희는 1965년 이만희 감독의 '흑맥'으로 출발해 이듬해 정진우 감독의 '초우'로 스타덤에 오른 후 '위험한 청춘' '막차로 온 손님들' '한' '타인들' '미워도 다시한번' 등 화제작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남정임은 1966년 김수용 감독의 '유정'을 첫작품으로 '어느 여배우의 고백' '요화 장희빈' '분녀' '봄봄' 내생애 단한번' 등의 작품으로 인기를 이어갔고, 윤정희는 1967년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으로 데뷔해 '강명화' '싸리골의 신화' '육체의 길' '순애보' '감자' '내시' '장군의 수염' 등에 출연했다.

세 여배우가 움직이는 곳이 영화와 연예 뉴스의 산실이었다. 한층더 그들의 라이벌의식과 신경전이 불쏘시게 가 되어 쉬지않고 화제를 낳았다. 그 무렵 정인엽 감독이 '결혼교실'에서 톱스타 신성일과 함께 세 여배우를 한 작품에 캐스팅하는 기발한 작전을 실현해 충무로를 들쑤셔놓기도 했다. 워낙 경쟁이 날카로울 때라 출연 비중과 역할은 물론 제작 발표회장의 좌석 배치, 선전 포스터의 이름 배치문제까지 배려하는데 소동이 반복했다.


돌이켜보면 세 여배우의 경쟁시대가 우리 영화의 가장 행복하고 꿈같았던 황금기였다. 주인공 중 사업가와 결혼해 다복하게 살던 남정임만이 1989년 47살의 나이로 고인이 됐다. 찬란한 '트로이카의 영광'도 1971년 남정임의 결혼과 함께 빛을 잃어갔다. 그 해 10월 문희도 언론사 사주집안의 며느리가 되고, 윤정희도 1975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컬러 TV가 안방들을 차지하면서 영화배우와 탤런트의 활동 경계가 허물어지고 은막에도 TV 스타들이 몰려나왔다. 홍세미 김창숙 안인숙 김희준 선우용녀 김자옥 염복순 등 탤런트들이 영화의 주역으로 등장했으나 3명 정도가 정상에 올라 경쟁관계를 이루지는 못했다.

트로이카 2대는 70년대가 막 지나갈 무렵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이 이어갔다. 물론 영화 기자들이 어느날 그렇게 쓰기 시작하면서 세 여배우가 트로이카 관계처럼 보였지만 2대 트로이카는 트로이카 1세대와 달리 기준이 약하고 작위성이 많이 따랐다. 경쟁도 치열하지 않았다. 첫 트로이카 스타들은 라이벌 관계를 의식하며 밤낮없이 새 작품의 정보를 먼저 입수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좋은 감독이나 흥행 작품을 위해서는 출연료 욕심을 비우고 서로 감독이나 제작진과 은밀하게 협상을 했다.


2대 트로이카 중 한명은 출연 작품의 흥행 결과나 TV드라마 시청률, 각종 활동 실적, 관객들의 인기도에서 다른 두 명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두 명 보다 3명을 모아 트로이카라는 이름 아래 정상급 라이벌 3각관계로 띄우면서 화제도 많이 발생했다. 때로는 그 중 한명이 다른 경쟁자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말을 해서 다른 두 사람이 발끈, 싸움이 일어나 화제의 불씨가 됐다.

2대 트로이카가 제대로 경합을 하기도 전에 이미숙 이보희 강수연 원미경 나영희 안소영 최명길 이혜영 금보라 최선아 김미숙 신혜수 김진아 김보연 황신혜 조용원 등이 등장해 주연급 별자리를 만들었다. 그 중 이보희 이미숙 원미경을 스타 3역으로 묶기도 했으나 눈길을 모으지 못했다.

90년대로 넘어가면서 초반에는 강수연 심혜진 최진실, 후반에는 심은하 전도연 고소영을 ‘톱스타’ 그룹의 트로이카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화배우 쪽의 활동이나 관객들의 인기는 심혜진 강수연 최진실 심은하 김혜수 이영애 최명길 오정해 신은경 등이 그런대로 비중이 있고 돋보인 시대였다. 그 중 최진실과 심은하가 영화와 TV드라마 양쪽에서 가장 눈부신 활동 실적을 남겼다.

김정은 전지현 손예진 임수정 하지원 문근영 이나영 박진희 김태희 등이 이 시대 여자 스타 그룹의 주역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톱스타’라는 말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트로이카라는 말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제 정상급 3명의 여배우가 트로이카를 만들 수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같다. 스타의 머리수도 많아졌고 관객 반응도 한두 작품에 따라 굴곡이 심하게 나타나 인기의 숨도 짧아졌다. 관객들의 선호도가 까다롭고 다양하며 변화무쌍해 톱스타로 오르기 전에 시들어 버리는 여자 스타들이 많아졌다. 남자들에게는 연기자가 평생의 전문직이 될 수 있지만 여성들에게는 나이의 벽을 극복하지 못해 톱스타의 기회가 와도 명이 길지 못한 것은 숙명같다. 우리 영화사에서 남녀 배우들 통털어 ‘톱스타’라는 칭호를 가장 오래도록 화려하게 누린 배우로는 신성일과 안성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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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성하훈 기자]87년 명동 농성을 시작으로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고등학생 시절 일찍이 세상에 대해 눈을 떴던 그들은 아직도 그 시대의 치열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20년 전의 경험은 늘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그 기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은 늘 당시의 열정을 화두로 지금도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20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전성원, 당시 동북고 2학년] "비참했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농성 해산"

▲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 성하훈 87년 명동성당에서 고등학생들이 농성을 시작할 때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2차 지도부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당시 서고련은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될 경우 농성자 모두가 구속될 수 있다며 나름대로 각오를 한 상태였고,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2차 지도부도 함께 구축한다. 전성원씨에게 서고련은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지막 촛불시위를 마치고 농성을 해산하던 날, 눈발이 휘날린 거리를 즐기던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참 비참했다"고 말한다.

"민주화를 위해 그토록 외쳤건만 성탄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고, 쓸쓸하게 마무리되던 투쟁은 개인적으로 큰 상처로 남았다"는 것이다.

고교 졸업 후 천안 등지에서 현장활동을 벌이던 그는 '이대로 살면 평생 막노동꾼이 될 것 같아서' 93년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광고회사 등을 다니다가 이후 지역문화 운동의 꿈을 안고 <황해문화>에 들어갔다. "맥이 끊긴 운동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역사 안에서 전통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은행에 돈빌린 사람들처럼 운동 전력을 내세우며 자기 알아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고등학생운동을 돌이켜보는 그의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운동세력이 많은 실망을 줬다고 평가하기에 '1987년의 어느 한 시절을 뜨겁게 보냈노라' 고백하기엔 낯뜨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87년 고등학생운동은 인생의 중요한 계기였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에 대한 빚진 마음이 남아있고 아직도 그 시대의 소명은 그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80년대의 어느 한 시절을 나름 운동가로 보냈으며, 현재 역시 의미는 다소 다를지라도 여전히 스스로를 운동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영진, 당시 문일고 2학년] "그 때의 마음 지금도 유효하다"

▲ 배영진 무주 구천초등학교 교사 ⓒ 성하훈 87년 당시의 일을 배영진씨는 일자별로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부분도 있지만 시기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덮여있던 당시의 상황을 모자이크 해내며 적절히 복원시켰다.

87~88년으로 이어지는 고등학생운동의 기억은 그의 삶에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면서 삶의 이정표가 됐다. 그의 표현대로 "삶의 가치를 갖게 했고, 삶의 지향점과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게 했던 것이 고등학생 운동"이었다. 또한 그것은, 지금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때의 마음이 현재도 유효"한 것이다.

푼돈 모아 유인물을 만들고, 스프레이로 펼침막을 만들고, 집에 모아놓은 우표들을 아낌없이 가져와 친구들에게 편지쓰기를 할 만큼 고등학생 시절 그들의 모습은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역사 앞에서 그리고 당시 처해있는 군부독재의 현실에서 제대로 된 시각을 갖고 올곧게 서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현장의 삶을 택한다. 노동자로 민중 속의 삶을 실천한 것은 당시 고등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선택한 길이었다. 고등학생 때의 의식이 단순히 관념이 아닌 실천을 담보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늦게 군대에 갔다 온 후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99년 또래들보다 10년 늦게 교육대학에 들어갔고,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참교육을 위해 애쓰고 있다. 민주교육을 싸웠던 고등학생 시절의 영향이 그의 진로를 결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87년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을 회고하며, 지금 청소년 운동에 나서고 있는 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당부라며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나이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한데, 내가 사용하지 못하면 고쳐라도 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삶 주변에 대한 관심 또한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경화, 당시 동명여고 1학년] "자살학우 추모제 하던 그 때, 그리고 지금"

▲ 정경화 민주노동당 고양시당 부위원장 ⓒ 성하훈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읽은 책은 충격적이었다.

광주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진실을 밝힌 <권인숙 성고문 사건>, 전태일 평전인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를 찾게 만들었다.

고1에 진학하며 6월 항쟁의 열기가 휩쓸고 지나갈 무렵 사회 현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고등학생은 차츰 세상에 대한 눈을 떠가고, 88년 서고련을 만든 선배들과 만나며 고등학생운동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88년 최대규모의 고등학생 집회였던 자살 학우 추모제 때 사회자로 나섰고, 그해 11월 고등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준비한 대학로 학생의 날 행사 때는 500여명의 학생들 앞에서 당당히 집회를 이끌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명여고 '동지단' '한울타리' 등 학내조직들과 함께 전교조 교사들이 해직됐을 때 종이비행기 날리기 시위를 벌이며 학내 집회를 주도하는 등 그녀는 고1~고3 시절을 고등학생운동의 중심에서 보냈다. 

정경화씨에게 그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기도 하다. 고등학생운동을 통해 "내 삶의 주인은 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고, "노동자로 살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행복하고 가장 기뻤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지금과 별 차이 없는 교육 현실은 안타까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자살 학우 추모제를 진행하면서 친구들 영정을 볼 때 가슴 아팠는데, 근 20년 동안 활동을 해왔음에도 아직도 진전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 같아요. 2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잖아요."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학교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은 선명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회상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과 불편한 것에는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일준, 당시 마포고 2학년] "기술개발로 사회에 이바지하고파"

▲ 손일준 (주)신기술산업 기술이사 ⓒ 성하훈 87년 부정선거 시비가 일었던 구로구청 주변에서 농성을 벌이던 그가 경찰의 강제해산을 피해 명동에 들어온 것은 12월 18일 오후였다.

그렇게 서고련의 농성에 합류한 그는 24일까지 명동성당에 있었고, 이후 이어진 각종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답지 않은(!) 선동능력을 발휘하며 대학생들을 무색게 만들었다. 적극적인 성격 탓에 집회 때마다 맨 앞에 앞장서 구호를 외치며 적극 참여했던 것.

88년 전두환 이순자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 때 맨 앞에 있다가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입원했을 만큼 저돌적인 면이 있었다. 

손일준씨는 89년 전교조가 결성됐을 때, 전교조 학생사업국에 상근하며 교육운동을 지원한다. 그러다 다른 친구들처럼 현장에 들어갔고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이내 작은 사업을 시작하며 지금은 건축 자재 벤처기업의 기술이사를 맡고 있다.

순탄하지 않고 부침을 거듭했던 사업 탓에 많은 어려움도 겪었지만, 최근 기술개발에 성공하며 한결 여유를 찾았다고 한다. 해외주문이 많아 외국출장도 잦은 모습이다.

그는 "자그마한 부분이지만 기술개발을 통해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며 "작은 벤처기업이지만 대기업에 기술종속 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등학생운동의 경험과 당시의 친구들을 소중한 자산이자 삶의 정체성을 찾게 해 준 근원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기술개발과 사업을 통해 사회에 작은 역할을 하려는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무치게 그리운, 그리워할 내 벗이여! 동지여!"

빚진 마음을 안겨주고 떠나간 전운혁, 이창진

서고련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빠짐없이 언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운혁과 이창진 두 사람이다. 이들은 87~88년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며, 동시에 많은 아쉬움과 함께 빚진 마음으로 남는 인물들이다. 2003년과 2005년 각각 불의의 사고와 심한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서른 중반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이 두 사람에게 대부분의 친구들이 갖고 있는 안타까움은 매우 컸다.

서고련 출범 당시 핵심역할을 맡았을 만큼 고등학생운동의 유능한 활동가였고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려던 사람들이었기에, 지금도 이들을 회상할 때마다 눈물짓게 된다고 한다.  한 친구는 이를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고 전운혁, 당시 서초고 2학년] 명동에서 영화판으로 다재다능한 인재

  ▲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일본영화 100> 영화평론가였던 전운혁씨가 작고하기 전 펴낸 일본영화 전문 서적이다. ⓒ 삼진기획 전운혁은 서초고 출신으로 서고련 출범 당시 3인 지도부 중의 한 명 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서고련 의장으로 불렸다. 87년 4월 교육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징계를 당하기도 했고 명동 농성준비와 이후 벌어진 고등학생들의 각종 집회에서 그는 늘 앞에 있었다.

고등학생운동의 성장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았으며 이후 운동단체에서 활동을 벌이면서 독재정권과의 대결이 있던 현장에는 어느 곳이든 달려가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제도교육 아래서는 그의 다양한 재능이 묻혔지만 문화적 소양이 깊었던 전운혁은 99년 이후 문화계 쪽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가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영화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문필가로서 그리고 영화평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푸른나무' 무크 동인으로 활동했고, 여러 전문 주간지에서 문화담당 기자를 거쳤으며, 하이텔 매거진 <넷와이더> 편집장, 엠파스 콘텐츠(시티스케이프, 시네마플라자 등) 총팀장, 영화 인터넷 매거진 <시네버스> 편집장 등 영화와 관련된 그의 활동은 왕성했다.  

<푸른나무-우리들의 이야기>(푸른나무, 공저), 편역서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책갈피), 일본영화 전문 안내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일본영화 100>(삼진기획)등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펴낸 책들이다. <조용원의 일본 시네마천국>을 진행하면서 일본영화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그는 이후 수많은 일본 감독들과의 직접 인터뷰 등을 통해 일본영화를 알리며, 일본영화 전문가로서 그 위치를 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의의 사고만 없었다면, 지금쯤 자기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을 인재였기에, 그를 아쉬워하는 마음은 그래서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고 이창진, 신일고 2학년] "이생의 삶이 더이상 의미없다 느낄 때"

신일고 문예반 반장이었던 이창진은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 소년이었다. 침착하면서도 리더십이 뛰어났던 그를 많은 친구들은 신뢰했고, 늘 겸손하게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를 처음 본 사람도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 서울시내 고등학교 문예반끼리의 백일장을 주관한 것도 그였고, 문화단체와 연관을 맺거나 다른 학교나 단체에 있던 친구들을 보듬던 것도 그의 몫이었다.

또한, 집회나 행사 때마다 그는 진지함과 안정감을 보여주며 친구들을 잘 아우르고 있었다. 88년 고등학생 집회 당시 연극공연에서 그의 배역은 친절하면서도 학생들을 아끼는 교사역할이었다. 성숙한 모습으로 차분한 성격의 이창진만이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역이었던 것이다.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던 정경화씨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홍대에서의 자살 학우 추모제 때였어요. 당일 사회를 보기로 한 분이 집에서 알고 막는 바람에 못 온 거예요. 행사시작 30분을 남기고 창진 선배가 갑자기 저를 부르더니 손을 꼭 잡고서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경화야! 네가 사회를 맡아줘야겠다' 급작스럽게 사회를 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마치 창진 선배의 목소리에 홀린 기분이 드는 게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네 그럴게요’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생운동을 마무리한 후 노동현장에 들어간 그는 인천에서 오랜 시간 현장활동을 하며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앓게 된 심한 우울증은 그를 힘들게 만든다. 그 소식을 알게 된 친구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써보지만 안타깝게도 2005년 7월 그는 세상의 끈을 놓아 버린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2003년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도 전 저의 이생의 삶이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몸을 던져버릴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작게 평가하고 살아가지는 않지요. 우리의 생명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요. 어쨌든 지금은 살아있다는 것이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전성원씨는 친구 이창진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이렇게 작별했다.

벗이여!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나의 사랑하는 벗이여!

잘 가거라, 나의 87년이여!
잘 가거라, 내 어린 날의 열망이여!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리운, 그리워 할 내 벗이여! 동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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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enes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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