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버그<미 버지니아주>=연합뉴스) 김병수 특파원 = 개나리꽃과 벚꽃이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4월 중순의 버지니아공대 캠퍼스는 너무도 평온했다.
푸른 잔디가 무성한 대학본부 앞 대운동장에선 금요일 오후를 맞아 야외활동을 즐기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일부 학생들은 벚나무 아래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웃옷을 훌렁 벗어버리고 하얀 어깨를 드러낸 채 봄볕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여학생도 눈에 들어왔다.
공놀이, 원반던지기놀이 도중 동료의 실수를 보고는 허파에 바람이라도 꽉 찬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학생들도 여기저기서 목격됐다.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어떻게 그런 끔찍한 참사가 발생했을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쳤다.
◇대학본부앞 추모비에 추모객 행렬 = 캠퍼스내에는 총기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됐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대학본부 건물 앞에는 성조기와 함께 이 대학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운동장을 둘러싼 순환도로에선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교내와 블랙스버그 시내를 오가는 셔틀버스에선 쉴새없이 학생들이 타고 내렸다.
운동장 주변 이곳 저곳에서 간혹 모습을 드러내는 경찰순찰차와 제복을 차려입은 경찰의 모습이 `이색적으로' 느껴지는 정도였다.
운동장 중앙 부분 대학본부 건물 앞쪽에 서 있는 흰색의 돌벽과 그 돌벽을 호위하듯 빙 둘러선 32개의 직육면체의 작은 돌들과 삼삼오오 이 곳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달라진 풍경이었다. 1년 전 참사를 떠올리는 유일한 표시인 추모비였다.
추모석 각각의 윗면에는 `로스 압둘라 아라메딘', `크리스토퍼 제임스 비숍' 등 참사로 희생당한 32명 교수와 학생들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추모석 앞에는 이 곳을 찾았다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던 듯 노트를 찢어서 즉석에서 쓴 추모의 글이 남겨져 있어 시선을 끌었다.
"리마, 네가 무척 보고싶어. 너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지. 사랑해"
고(故) 케빈 그라나타 교수의 추모석 앞에는 사진과 함께 그라나타 교수의 생애를 기록한 글이 놓여 있었다.
며칠 전 21살 생일을 맞은 레슬리 제럴딘 셔먼의 추모석 앞에는 샴페인과 선물인듯한 보석 귀걸이, 하트 마크와 함께 "Happy Birthday, We love Leslie(생일축하해, 레슬리를 사랑해)"라고 적은 생일 축하글도 있었다.
추모석이 둘러싸고 있는 추모비의 한가운데는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버지니아공대"라고 적힌 사각의 반듯한 돌이 놓여져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겠다는 버지니아 공대인들의 각오를 담았다.
추모비를 둘러보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대학 학생.교수들은 물론 블랙스버그에 사는 주민이나 어린 아이,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추모비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애견을 데리고 추모비를 찾은 한 30대 백인 여성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곳에 들렀다"며 디지털 카메라로 추모석과 추모비 주변의 모습을 담으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마침 대학본부 건물 인근에선 이 대학 학군장교후보생(ROTC)들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대학 출신으로 최근 아프간 전쟁 참전 및 군복무 도중 전사한 동문 2명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으나 1년전 총기참사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노리스홀 강의실 창문에 성조기 = 총기참사 이후 작년 8월까지 폐쇄됐던 노리스홀 건물은 현재 이 대학 기계공학과 과사무실 및 교수.대학원생 연구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노리스홀은 당시 30명의 교수.학생이 희생됐고 범인 조승희도 경찰과 대치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노리스홀의 강의실은 현재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버지니아공대는 총기 참사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 위해 이곳 노리스홀을 `평화 및 폭력방지센터'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건물밖에서 참사가 발생했던 한 강의실을 바라보니 유리창에 성조기가 붙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 대학 기계공학과에서 박사후(後)과정을 밟던 중 참사로 지도교수였던 리비우 리브레스쿠 교수를 잃은 정남희 박사는 "연구실에서 화장실을 가다보면 불꺼진 교수님의 연구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 박사는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자꾸 끔찍한 일이 생각난다며 노리스홀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만 자는 지금도 교수님이 옆에서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스승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끝을 흐렸다.
노리스홀을 비롯해 각 강의실 건물 주변에는 `Emergency(비상사태)'라고 글씨가 적힌 파란색 전등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대학측은 사건 이후 당초 기숙사에서 조승희가 1차 범행을 저지른 뒤 제대로 대응 않고 사건을 방치, 2차 범죄가 가능했었다는 등 학교의 대처가 부적절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파란색 비상사태등은 학생들에게 긴급상황임을 신속히 알리기 위한 조기경보시스템의 일환이다.
학교측은 이와 함께 긴급사태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문자서비스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즉각 알리는 경보시스템도 마련했고 경찰들의 교내 순찰도 강화했다.
◇다양한 추모행사 계획 = 버지니아공대는 총기 참사 1주년을 맞이하는 오는 16일을 `추모기념일'로 정해 하루 동안 휴강하고 다양한 추모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학교측은 16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정오까지 대학본부앞 운동장에서 공식 추모식을 가진 뒤 이날 저녁에는 총학생회 주최로 추모비 앞에서 추모촛불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또 이 대학 퍼스펙티브갤러리에선 이날 `4월16일: 기억.인식.치유'라는 제목으로 4.16 참사 관련 전시회가 열리는 것을 비롯해 하루종일 댄스 공연, 음악회, 가든 투어, 추모시 및 글 발표회, 소프트볼 경기, 체스게임 등 다양한 추모행사가 계획돼 있다.
한편, 4.16 참사 때 노리스홀에서 부상을 입은 이 대학 졸업생 엘릴타 합투는 16일 워싱턴 D.C.의 대법원과 미 의회 빌딩에서 총기규제 강화를 주장하는 단체들과 함께 `드러눕기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합투는 "미국의 총기관련법이 너무 느슨해서 위험한 인물들이 총기를 구입하는 게 너무 용이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잊지 않을 것"= 버지니아공대측은 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인터넷홈페이지를 운영, 희생자들에 대해 소개하고 각종 행사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찰스 스티거 총장은 최근 이 홈페이지를 통해 학생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작년 4월16일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일을 경험했고 지금도 우리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 "우리는 희생자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홈페이지에는 `4.16참사'로 친구와 동료, 스승, 제자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상처에서 조속히 벗어나길 다짐하는 글도 줄을 잇고 있다.
시인인 니키 지오바니 교수는 추모시를 통해 "우리는 피와 눈물, 모든 슬픔을 이겨내고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것"이라면서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시와르 퓨리 기계공학과 학과장은 참사 당시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보호하려다가 희생당한 리브레스쿠 교수에 대해 "그는 자신이 살아왔던 대로 돌아가셨다"면서 "그는 학생들에게 헌신했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고 추모했다.
아버지가 주한미군이어서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혼혈 희생자 메어리 카렌 리드의 가족들은 "메어리는 가족, 친구들과 산과 바다, 호수 등으로 여행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으며 다른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도울 때 가장 행복해했다"고 회상하며 명복을 빌었다.
이집트에서 함께 유학와 박사의 꿈을 키우던 동료 왈리드 모하메드 샤알란을 잃은 파하드 파샤는 "작년 4월16일 새벽4시께 시험공부를 함께 하면서 왈리드는 늦여름이 되면 이집트에 있는 아내와 아들이 이곳으로 오게 된다며 무척 기뻐했다"고 마지막 대화를 회상했다.
◇한인학생들 "참사 이후 불이익 당한 일 없어 다행" = 총기 참사의 범인이 한국계였다는 사실 때문에 `보복'을 우려하며 가슴 졸여야 했던 한인 학생들은 "참사 이후 한국계라는 이유로 특별히 불이익을 당한 것은 없어 다행"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유학온 한 대학원생은 "참사 이후 과거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과 같은 후폭풍을 우려했었다"면서 "한국인들이 집단적인 죄의식을 느낀 것과 달리 미국인들을 총기사건을 철저히 조승희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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