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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CSE,CCNA/CCNP,자바등 국제자격증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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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최영도 변호사의 토기 사랑 한평생 <2편>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최영도 변호사는 1973년 군사독재 시절 사법부 파동의 주역으로 해직 판사가 됐습니다. 그 후 민주화를 외치는 많은 젊은이들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싸우기도 했구요. 민변의 창립자이자 회장으로, 또 참여연대의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 오셨습니다.
한편 그는 변호사로서의 유명세 못지않게 ‘토기 수집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인 토기 컬렉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최영도 변호사의 클래식 음악과 토기 사랑 한평생! 11월 7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인권 변호사 시절, 재판 중 피고인이 판사에게 고무신을 던진 적도 있어▶ 인권변호사로도 유명하신데요. 많은 사건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으시면 말씀 좀 해주시죠.
저는 주로 대학생들을 많이 변론했는데요. 그 때 대학생들의 이슈는 ‘전두환 독재 정권 타도, 민주 헌법 쟁취’였습니다. 그 중에서 ‘고무신 사건’이라고 제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어요.
대학생 하나가 집시법 위반으로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아서 다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면복권이 돼서 이제는 전과에 관계없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면복권 됐어도 사실상 취업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남의 주민등록증을 이용해서 위장취업을 했어요. 그랬다가 잡혀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용공조작이 돼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가 됐습니다.
제가 구치소로 면회를 갔더니 이 학생이 말을 시작하기 전에 ‘전 아무개, XXX’ 하는 말이 아주 입버릇처럼 붙었어요. 그 말을 한 서너 번 하고 나서 말을 시작하는 겁니다. 중간에도 또 그러고요. 그러면서 내가 위장취업을 한 것은 자구(自救)행위다, 우리 식구들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거다, 내가 취업 못하는 것이 내 잘못이냐, 국가가 잘못한 것 아니냐, 그런데 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라고 하면서 말을 하는데, 제가 ‘아, 이친구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상처받은 영혼의 처절한 울부짖음 같다.’ 하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접견을 마치고 오면서 “학생, 법정에서는 ‘전 아무개, XXX’ 이런 용어를 쓰지 말고, 좀 학생답게 품위있는 용어를 써라. 나는 그렇게 부탁한다.”라고 했는데, 재판 기일이 통지가 돼도 이 친구가 구치소에서 안 나가는 겁니다. 재판제도 자체를 부정한다면서 안 나오는 거예요.
몇 번을 그러다가 어느 날 법정에 나왔어요. 거기서도 역시 계속 욕을 하면서 재판장한테 “나를 고문해서 빨갱이로 몰은 수사관과 검사를 이 법정에 세워서 먼저 책임을 추궁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나 이 재판 못 받겠다.”면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겁니다. 판사가 이름이 뭐냐고 해도 대답도 안하고, 주소를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요. 묵비권은 권리니까, 판사가 “그럼 피고인 심문 없이 시작하겠습니다. 검사! 공소인 진술하세요.” 라고 하니까 그 학생이 “나 이런 재판 못 받겠다. 재판 거부하겠다.” 하면서 그냥 나가버렸어요.
그런데 나가기 전에, 그 당시에는 피고인들이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고무신 한 짝을 벗어서 판사 얼굴을 향해 던졌어요. “나 이런 재판 못 받겠다. 이 무슨 개같은 재판제도냐?” 하면서 말이죠. 저도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얼굴에 맞지 않고 싹 스쳐서 뒤에 벽에 맞았는데, 판사가 잠깐 당황한 듯 하다가 계속해서 피고인 없이 재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그냥 나가면 더 불리할 것 같아서 피고인 없이 그냥 변론 다 했습니다.
그리고 재판 끝난 다음에 한참 후배지만 그 판사를 찾아가서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랬더니, “선배님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고 상당히 침착하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중형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사구형이 4년이었는데 1년 선고를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많이 봐준 겁니까? 그래서 참 제가 깜짝 놀란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 그럴 때는 변론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저는 그런 식으로 변론을 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헌법을 쟁취해서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겠다는 것이 뭐가 나쁘냐? 민주화 하겠다는 것 아니냐? 나는 이런 학생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희망이 있다고 본다. 만약 이런 학생들조차 없어서 침묵을 하고 있다면 대한민국은 볼 장 다 본 나라다.” 그러면서 악을 썼죠.
그 당시 유일하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공간이 바로 법정이었어요. 거기서 밖에서 하지 못하는 말을 다하고 카타르시스를 해소하고 그랬죠.
▶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면서도 이러한 사건들이 무수히 많았죠?
법정에서 고무신까지 던진 사건은 없지만, 재판장한테 막 대들고 재판 거부하고 나가는 것은 다반사였어요.
▶ 변호사 생활을 하시면서 불가항력이나 한계를 느끼는 경우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저를 포함해서 그 당시에 20명 가까이 되는 변호사들이 시국 사건을 무료변론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 20명이 한 건도 무죄를 선고받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런 사법부를 상대로 무죄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해서 우리는 참 무능한 변호사들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 사건을 변론하면 더 유죄, 더 무거운 판결이 나오는 것 같으니까 우리 변론을 그만두자.” 라고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우리가 모여서 한 잔 마시면서 울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그래도 우리마저 없으면 어떡하냐? 그 대학생들, 노동자들. 우리가 가서 그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이끌어 내서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기 소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자. 우리가 그것을 이끌어주지 않으면 그 친구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변론을 계속하자.” 라고 해서 변론을 계속 했습니다.
▶ ‘인권 변호사’ 제도가 생긴 것은 언제쯤인가요?
인권 변호사라는 제도는 없고요.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범, 양심수들이 생기고 그분들을 아무도 변론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몇몇 변호사들, 특히 4인방이라고 해서 황인철 변호사, 홍성우 변호사, 이돈명 변호사, 조준희 변호사, 이 네 분이 처음에 많이 했죠.
그러다가 그 영향을 받아서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해서 스무명까지 되는데요. 그 전에는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조직을 하지 않고 그냥 개별적으로 사건을 맡아서 했어요. 그러다가 1986년에 들어가니까 대학가에서 전두환 독재타도, 민주헌법 쟁취 투쟁이 아주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공안 당국이 이 학생들을 수십명이 아니라 수백명, 천명씩 구속을 해서 집시법이나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막 기소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엄청난 시국사건이 터져 나오는 거죠. 마치 그냥 홍수가 나는 것 같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인권 변론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니까 안되겠다, 조직화하자 해서 그 때 28명의 시국사건 변론 변호사들이 모여서 ‘정의실천 법조회(정법회)’라는 것을 조직해서 그 상황에 대처하게 되었죠.
그래서 그 때 참 변호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5월에 정법회 멤버들과 그런 사건들을 변호하던 진보적인 소장 변호사들이 합쳐서 51명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창립하게 된 겁니다.
▶ 그러시는 동안 정권이나 기관으로부터의 불이익 같은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몇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탄압을 했는데요. 아까 말씀드린 홍성우 변호사 하고 이돈명 변호사는 기무사(그 당시에는 보안사)에 잡혀가서 고난도 당했고요. 징역을 갈래, 2년간 휴업을 할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2년간 휴업을 하겠다고 하고 나와서 그 두 분이 2년간 강제로 휴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미행도 하고 정황 수집도 하고 그랬겠지만, 저에 대해서는 뭐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온 것은 없고, 다만 제가 처음에 천안에 가서 변호사 개업했을 때 중앙정보부하고 정보경찰하고 수시로 감시하는 것을 제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 6.10 항쟁 때는 우리 집 3대가 데모에 참여하기도 해▶ 그 때 변론을 해주신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신 적도 있으시다고요?
제가 86년 5월에 ‘5.3 인천소요사건’이라고 큰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 때 인천에 가서 학생들을 몇 명 변론을 했는데, 물론 전원 실형을 받았죠. 그래서 제가 많이 절망도 하고 그랬는데, 6년 후에 제가 변론했던 어느 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었는데 찾아와서 “선생님, 주례 좀 서주십시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는 뭐 그렇게 행복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주례를 한 번도 안 섰다. 다른 분한테 부탁해라.” 그랬더니 “선생님이 주례 안 서주시면 저 결혼 안하겠습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때 한 번 주례를 선 적이 있는데, 주례사가 참 걸작이었습니다. “하객 여러분, 저는 신랑을 교도소에서 만나고 법정에서 만난 인연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게 된 것도 이런 젊은이들이 민주화 투쟁을 하고 감옥에 가고 하는 처절한 투쟁의 결과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젊은이들을 위해서 한 번 큰 박수를 쳐주십시오.” 이런 유례없는 주례사를 했습니다.(웃음) 그런 주례사는 아마 어디에도 없었을 겁니다.
▶ 그 당시에 민주화 투쟁을 하던 분 중에 소위 지금 정치권 쪽으로 진출한 분들도 많죠? 혹시 그런 인연은 없으신지요?
제가 그 변론한 분 중에 고려대 학생을 변론했는데요. 그 분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이라는 별명이 붙은 안희정 씨를 제가 변론을 했어요.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제가 언젠가 시국사건 봉투를 정리하다 보니까 ‘안희정’ 이라는 이름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뒤져보니까 바로 그 사람이예요. 그래서 제가 변론한 사람 중에는 안희정 씨가 정치권으로 갔죠.
▶ 시류에 편승해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그런 길을 택하신 것에 대해서 갈등이나 회의가 솔직히 없으셨나요?
없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저항적인 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일제시대에도 고등계 경찰에 붙잡혀 보름 동안 고문을 당해서 돌아가실 뻔한 적도 있고요. 저도 그런 피를 물려 받았는지 상당히 저항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6.10 항쟁 때 우리가 3대가 시위를 했어요. 저는 민변 동지들과 시청 앞 종로로 나가서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변호사들이 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을 맞고 막 기어가면서 울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때 제 아들이 연세대학교 입학해서 1학년이었는데, 얘는 매일 새벽에 최루탄 범벅이 돼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최루탄을 맞고 들어오면, “아버지, 비비지 말고 그냥 10분 동안 샤워로 흘려내세요.” 하면서 요령도 가르쳐주고, 시위 시작하기 전에는 치약을 바르라고 가르쳐 주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를 가서 뵈었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래서 “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그랬더니, 그 때 82세이셨는데 “아유, 이제 난 데모도 못 하겠다.”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데모하셨어요?” 했더니, 아버지가 그 때 장학 기금을 YMCA에 기탁을 해놓고 매년 수십 명의 학생들한테 장학금을 주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종로 2가 YMCA에 가셨다가 거기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으니까 지팡이를 짚고서 학생들과 같이 하신 거예요. “독재정권 물러가라. 민주헌법 쟁취하자.” 라고 하시다가 경찰관이 쫓아오면 골목으로 도망을 가셨다가 또 나와서 또 하시고 이걸 2시간을 하셨대요. 그러니까 탈진이 돼서 기운이 하나도 없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무실에 나와서 마침 그 때 ‘민추’에 계시던 분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어떻게 이 얘기가 기자들한테 들어갔어요. 기자들이 저한테 열심히 전화를 걸어서 “그 아버지를 좀 취재할 수 없느냐?” 해서 제가 아버지께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 끊었는데, 그 때 중앙일보 기자인가 어떻게 아버지 집을 알고 찾아가서 취재를 해서 그 신문 전면에 ‘3대가 시위투쟁하는 집안이다’ 해서 기사화 됐던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제 아들이 지금 사시 합격해서 변호사인데요. 걔도 또 민변 회원이예요. 그래서 아마 저희는 그렇게 고민하고 ‘저쪽에 설까?’ 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 그런 걸 ‘반골(反骨)’이라고 표현하고 그랬죠? 그 정의로운 반골이 더 많았던 것 같이 생각이 되네요.
많았죠. 그 때 보면 주로 투쟁하는 사람들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참 처절한 투쟁을 했죠.
▶ 다시 음악 얘기를 해보죠. 그 당시 상황이나 스트레스가 많으셔서 음악이 주는 위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제가 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예요. 그래서 뭔가를 항상 합니다. 화랑을 돌아다니면서 미술품 수집도 하고, 토기 수집도 하고, 음악도 듣고, 세계 문화유산 답사도 하고 부지런하게 살았어요. 사람들이 “당신은 세 사람 몫을 살았다” 하는 얘기도 하는데요.
제가 음악을 그렇게 열심히 들으면서 그런 것을 통해서 거기서 재충전을 해서 사건을 열심히 했죠. 사건을 해서 돈을 벌어야 또 토기를 사니까요. 그래서 사건 열심히 해서 몸이 피곤해지면 오히려 토기시장에 가서 그것을 사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거기서 재충전을 해서 또 사건을 하고요. 이런 것이 계속 반복이 되는 거죠. 그런 반복이 승화돼서 점점 더 좋아진 케이스죠.
▶ 슈만의 ‘트로이 메라이’도 아주 좋아하신다고요.
네. 그 곡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곡은 슈만이 ‘어린이의 정경’이라고 하는 13곡의 소곡을 합쳐서 만든 ‘조곡’인데요. 그 중의 일곱 번째 곡이예요. 길이는 3분도 안 되는 유명한 멜로디죠. 이것을 애들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 아니고, 슈만 자신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작곡한 어른들을 위한 곡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여러 피아니스트들이 치는 것을 들어봤습니다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라고 하는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치는 것을 들으면서 제가 여섯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4년 동안 살았던 고향을 찾아가는 거예요. 근데 갑자기 안개 같은 것이 끼어서 앞이 희미해져서 여기였던가 저기였던가 눈물을 흘리면서 가는데 아무래도 안 나타나요. 그래서 막 헤매는 꿈을 꿨는데요.
그것이 왜 그랬냐면 호로비츠가 연주를 하면서 일부러 유려하게 흘러가던 멜로디를 멈칫멈칫 일부러 페달을 밟아서 끌어 잡아당깁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헤매면서 주저주저 하고, 그래서 그것이 마치 제가 고향을 찾아가면서 울면서 멈칫멈칫하고 헤매면서 주저주저하는 제 모습과 너무 똑같아요.
그래서 제가 울면서 들었는데, 이렇게 연주한 피아니스트는 호로비츠 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호로비츠는 내가 5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렇게 울면서 찾아가는 그런 것을 예상하고, 그러니까 작곡자의 의도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감정을 생각하면서 일부러 이렇게 연주한 거죠. 한 번 들어보시죠.
참 좋죠? 한 번 들으면 열 번쯤 듣습니다.
◇ 평생 모은 1,630점의 토기... 국립중앙 박물관에 기증▶ 이렇게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도 깊으셔서 토기박물관을 세워도 될 정도로 귀한 토기를 많이 수집하셨다는 건 유명한 얘기죠. 어떤 계기가 있으셨던 건가요?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외국인들이 다 사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 안 지나면 토기의 씨가 마를 것이다. 그 당시에도 고미술품 애호가들이 서화 도자기는 수집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토기는 없었어요. 그래서 이러다가는 정말 우리 토기 다 없어지겠다 해서 그럼 토기 전문 박물관 하나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자는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630점을 수집해서 그것을 전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기증한 분의 이름과 함께 특별실이 마련되어 있죠?
네. 제 이름으로 된 기증실이 한 55평 정도 독립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 그것은 계속 이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영구적입니다.
▶ 책을 보면 토기에 대한 예찬이 많으신데요. 왜 하필 ‘토기’이셨나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서화 도자기는 많이 수입하죠. 물론 언뜻 보기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토기는 토기대로 장점이 있어요. 그 순박한 산골처녀 같은 질박하고 깨끗하고, 너그럽고, 당당하고 하는 장점들이 있어요. 그래서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고, 심지어는 제가 좋은 토기를 사면 씻지도 않고 한 일주일쯤 침대에서 잠을 잡니다.
▶ 주무시는 것뿐만 아니고 뽀뽀도 하신다면서요?
아, 그건 좀 나중에 말씀드리고요. 한 일주일쯤 껴안고 자다가 그것을 거실에 제일 잘 보이는 곳에 한 달쯤 나뒀다가 다락에 있는 다락에 있는 수장고로 올려가죠. 그러다가 한밤중에 잠이 깨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서 또 올라가요. 집사람은 자다가 곁에 제가 없으면 또 올라갔구나 하고 차 끓이고 과일 깎아서 올라오죠.(웃음)
그래서 둘이 앉아서 그것을 보면서 여명이 창문으로 쫙 비쳐 들어와서 뿌연 햇빛이 들어올 때 까지 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것 몇 개는 아내가 “당신 애인이다” 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요. 그 중에 특히 제일 좋았던 것은 아주 값이 싼 백제 토기병이었는데요.
마치 입매무새가 깔끔하고 복스러운 여인처럼 생겼어요. 분을 바른 것처럼 희고 동그란데 백옥같은 피부에 속살이 통통하게 찐 여인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성격도 원만해 보이고 아주 부드러워 보입니다.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면 부드러운 촉감이 마치 여인의 몸을 더듬는 것처럼 야릇한 느낌까지 줍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그것을 볼 때마다 백제 미인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걸 보러 다락에 올라가서 한참 몇 시간씩 쳐다보고 그러다 동창이 밝아오고 하는 거죠.
▶ 밤을 지새울 정도로 대화를 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고려시대의 병인데, 목이 약간 상큼하고 어깨가 약간 벌어졌다가 쫙 내려간 술병인데요. 그 목에다가 돋움 무늬를 해놨어요. 양각처럼 밖으로 튀어나오게요. 그것이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제 애인인데, 딱 보면 현대의 멋쟁이 여인이 까만 옷으로 치장을 하고 진주목걸이를 두른 형상입니다. 그래서 백제토기와 이것을 나란히 놓고 항상 보는데요. 하나는 천 여년 전의 백제미인, 하나는 현대미인. 그렇게 대비가 되죠.
▶ 사모님이 질시의 의미로 ‘애인’이라고 하신 건 아닌가요?
그렇진 않고요. 제가 하도 좋아하니까 “이건 당신 애인이예요.”하더라고요.
▶ 꼭 가격이 비싸서 좋아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네. 이건 아주 값싼 것들입니다.
◇ 토기들이 박물관으로 가던 날...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워져▶ 그래도 1천6백여점이면, ‘수십 억원’ 이라고 자료엔 표시가 되어 있던데요?
그 때 1,580점을 1차로 기증했습니다. 그 뒤로 2차, 3차 해서 1,630점을 기증했는데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처음 기증한 1차분을 가지고 국립박물관 측에서 만약 이것을 미술시장에 풀었다면 수십 억원 어치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것이 신문기사로도 나오고 했는데요. 저는 얼마쯤 되는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어요.
▶ 그렇게 애지중지 하시던 것들을 아무리 좋은 의미의 기증이지만 수십 억원대의 토기를 기증한다는 것은 너무 아까운 것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힘으로는 박물관을 설립할 수 없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왜냐하면 땅을 사고 그 위에다가 박물관 건물을 짓고 그 박물관을 운영할 수 있는 적어도 백억 이상의 기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수백억이 더 들어가는 거예요. 도저히 제 힘으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제가 서면을 보내서 국가에서 이런 박물관을 지어서 운영을 해주신다면 제가 이것을 전부 무상기증하겠다고 했더니 정부에서 예산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대기업 오너에게 박물관을 지어서 운영해주신다면 제가 이것을 무상기증 하겠다고 했는데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걱정을 하기 시작했죠. 이걸 어떡하나 고민하느라 그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외국에 해외여행을 할 때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못 돌아오면 이것을 전부 대학이나 공공기관에 기증해라.” 라고 하고 나갔죠. 그래서 그 때의 제 심정은 과년한 딸을 좋은 혼처를 찾아서 빨리 출가시키고 싶은 아버지의 아주 답답한 심정이었죠.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도 ‘갑자기 내가 여기서 차에 치여 죽으면 어떡하나? 그럼 저 토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증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들었어요. 제가 감히 국립중앙박물관은 생각을 못했거든요. 어디 내 컬렉션이 거기에 맞기나 할까 했는데, “그걸 주시면 방을 하나 따로 마련해서 영구히 운영을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것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기뻐서 기증을 했죠.
▶ 개인이 소장하지 않고 온 국민과 세계 사람들에게 보이겠다는 그 마음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는 그 토기가 한 두 점, 열 점 미만이면 제가 가져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백 점, 천 점을 넘어가다 보니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국민의 것이다, 그래서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국민한테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기증을 하게 되는데요.
국립중앙박물관 하면 옛날로 보면 왕궁 아닙니까? 그래서 이 토기가 사흘에 걸쳐서 세 트럭이 나갔는데, 그 세 트럭이 나가던 날 다락 수장고로 올라가서 아버님 영정에다 대고 “아버지, 제가 이번에 큰 일 한 번 저질렀습니다.” 라고 했더니 진짜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 잘했다. 네가 드디어 해냈구나.” 하시는 것 같아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느낌이 뭐냐 하면 이제는 토기에 대한 무거운 관리 책임에서 내가 벗어났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 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해방감이 쫙 밀려오는 겁니다. ‘아,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명예이고 속박이구나. 이렇게 다 주고 나니까 가볍고 자유롭구나.’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니 박물관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 토기 전시실이 2층에 있던가요?
네. 기증관 2층에 있습니다.
▶ 여행 얘기도 좀 해봐야겠어요. ‘노마드’ 기질도 있으신 것 같아요.
그것은 아니고요. 제가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아프리카 끝, 중남미, 러시아, 북구라파 등을 많이 다녔습니다. 총 55개국을 다녔습니다. 제가 그렇게 다니게 된 것은 세계사, 세계지리에 관심이 많았고, 일찍이 김찬삼 교수가 쓴 <세계일주 여행기> 3권으로 된 것을 그 교수님으로부터 증정을 받아서 아주 탐독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여행을 다니게 되니까, 여행사에서 만든 패키지 여행은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어떤 방법을 썼냐 하면 제가 가고 싶은 곳을 다 짜서 여행사를 불러서 이대로 시행을 해달라고 해서 제 마음에 맞는 동호인들을 한 10여명 모집을 해서 그런 여행을 주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어쩌다 보니 아마추어 여행 기획자가 되고 했죠. 처음에는 유럽을 많이 다녔는데, 나중에는 인류의 시원, 인류의 역사, 어떻게 해서 인류가 지금 이렇게까지 됐느냐, 그래서 세계 문화유산을 답사해보자라고 생각을 해서 네팔, 인도, 버마, 캄보디아, 자바, 티벳, 돈황, 이집트, 그리스, 에게해에 있는 크레타섬,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과 마야 문명, 페루의 잉카 문명, 그리고 제가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이 실크로드를 횡단한 겁니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요. 그래서 세계문화 유산 답사를 하고 세계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게 된 거죠.
▶ 세계문화 유산 답사기를 쓰시던 중에 위암 판정을 받으셨다면서요?
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토기를 전부 기증하고 나서 좀 허전하고 뭔가 했으면 좋겠는데 뭘 할까 망설이던 차에 주위의 사람들이 세계문화유산 답사를 많이 했는데 그 정보를 혼자 가지고 있지 말고 답사기를 써서 그 여행정보를 공유하자고 하는 권고가 있어서 제가 답사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쭉 써서 상당히 여러 편을 변호사 잡지에 연재를 했는데, 어느 날 몸이 좋질 않아서 한 달 가량 계속 쓰다가 검진을 받았더니 ‘위암’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초기다, 95%는 틀림없이 완치된다고 했는데 수술을 받고 보니까 3기 초기더라고요. 그래서 생존율이 53%인거예요. 그런데 저는 걱정을 안했어요. 하나도 걱정이 안 되더라고요. 이상하게 침착하고 오히려 ‘하나님! 제가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베토벤보다도 오래 살았습니다. 이 하찮은 저를 그렇게 오래 살려 주셨으니까 이제 데려 가신다고 해도 저는 원망치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고 싶으시면 데려 가시고, 저를 더 오래 살게 해주시면 오래 살겠습니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투병을 했어요. 그랬더니 나았어요. 지금 5년이 거의 다 돼가는데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 최변호사님은 비유도 다르셨네요. ‘모차르트보다 베토벤보다 제가 더 오래 살았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시는 것 보면 말입니다.
반 고흐, 이상 보다도 오래 살았죠.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고람 전기’라고 있죠? 그 분도 20대 후반에 요절을 했는데, 제가 좋아하는 조선시대의 화가입니다. 그런 사람들보다는 제가 많이 살았죠. 64년을 살았으니까요. 베토벤은 57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7년을 더 살았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위암 수술을 받고 석 달이 못 되어서 항암제를 먹고 투병을 하면서도 인사동과 장안평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사동과 장안평에 가서 또 토기를 사왔어요.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진주, 부산, 대구를 다니면서 커다란 상자로 토기 세 상자를 사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집사람이 “몸도 편치 않은데,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라고 처음 싫은 소리를 하더라고요.
▶ 클래식 음악, 토기를 사랑하신 것은 최변호사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여쭙고 싶네요.
감히 토기는 제 삶 자체였다는 생각이 들고요. 클래식 음악은 ‘더럽혀진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는 물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저에게도 적용이 되요. 제가 인생을 사는 것이 아주 고달프고 슬플 때는 제일 많이 듣는 음악이 아까 말한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듣는데요. 그러면 맘이 편안해지고 모든 고뇌가 사라져요. 그리고 저한테 위안이 되고 아주 착한 심성을 갖게 해주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은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동반자처럼 느껴집니다.
▶ 사모님은요?
우리 집사람도 저와 마찬가지로 토기도 좋아하고 미술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하고요. 저와 같이 취미생활을 했으니까 아주 좋았죠. 부부가 취미가 서로 다르면 힘들다는데 저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 끝으로 ‘Were You There' 라는 흑인영가를 골라 주셨어요.
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거기 너 있었니’라고 하는데요. '저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너 거기 있었는가' 하는 의미의 흑인영가인데요. 제가 이 판을 밤에 사 들고 들어와서 틀었어요. 그런데 너무 늦은 밤이라 집사람은 자고 있었죠.
그런데 이것을 탁 트는데 처음에 나오는 남성의 저음 허밍부터 콱 사람을 질리게 하더라고요. 제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집사람도 일어나서 한 번 더 들어보자고 해서 다시 들었는데요. 로저 와그너 합창단이 불렀고요. 메조 소프라노 샐리 데일리가 불렀는데,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곡입니다. 한 번 들어보시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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