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조금 지쳐있을 때, 몸이 유달리 고단할 때면 가끔씩 흙 냄새가 그리워진다.

도시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어쨌거나 땅에 대한 그리움이 유전자 깊이 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이럴 땐 천을산에 올라가본다. 천을산은 대구 수성구 시지동 고산중학교 바로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산이라기보다 언덕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천을산은 수성구청에서 해맞이 행사를 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천을산은 특히 여성과 노인들이 좋아하는 산이다. 오르는 데 힘이 들지 않고 아기자기한 맛 때문이다. 천을산 초입에는 갖가지 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포도·복숭아 등의 제법 규모있는 농장도 있지만 대부분 인근 주민들이 자급자족하려 재배하는 파·부추 등이 오밀조밀 심어져 있다.

이제 산은 겨울 분위기를 벗어버리고 서서히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 천을산에는 농민들의 봄맞이 준비가 한창이다. 땅을 고르고 울타리를 치는 등 봄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천을산이 더욱 정감있는 이유는 작은 못‘서당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을산 올라가는 길에 인근 학생들의 생태체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서당지’가 자리잡고 있다. 연꽃 필 무렵에는 온 못이 연꽃으로 뒤덮일 만큼 보존이 잘 된 연못.

그곳엔 늘 강태공 한두명 쯤 세월을 낚고 있다. 이런 정취가 어우러져 천을산의 풍경은 비로소 완성된다. '아는 사람만 아는’산책로 이긴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풍경을 느낄 수 있어 특별히 사랑받는 산책로이기도 하다. 해발 121m로 비교적 낮은 천을산은 절반 정도 높이까지는 언덕길처럼 완만하다. 송전탑을 지나 10분쯤 오르다 보면 안심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관을 만날 수 있다. 멀리 팔공산이 보이는 탁 트인 뷰 포인트(viewpoint) 앞에선 누구든 발걸음을 멈추고 사색에 잠기게 된다. 때마침 지나는 기차의 경적소리까지 들리면, 자연의 정취가 한껏 살아난다. 이처럼 산 자체는 높지 않지만 들판 한가운데 솟아 탁 트인 전망 덕에 해맞이 장소로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제법‘산’다운 길이 나타난다. 숨이 가빠지는 산길을 15분쯤 오르다 보면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엔 배드민턴 경기장·훌라후프·철봉 등 간단한 운동시설이 있어 운동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북적인다. 이곳을 종종 찾는다는 이성한(45)씨는 “산을 산책하듯 올라와 간단하게 몸을 풀고 나면 훨씬 상쾌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산 정상에서 하늘도 보고, 꽃도 보고, 몸을 움직이다가 내려갈 무렵이면 은근히 서운한 느낌도 든다. 이 기분을 핑계 삼아 다음 산행을 기약하곤 한다.

내려오는 길에 직접 캔 봄나물을 한움큼 쥐고 있는 등산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매일 이웃 주민들과 산책을 즐긴다는 이미영(41)씨는“잘 살펴보니 봄나물이 돋아나 있어, 저녁 반찬거리를 해결했다”면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산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천을산은 아카시 나무와 소나무가 많아, 산행 중에 운치 있는 소나무들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그 뿐인가. 5월이 되면 꽃향기로 온 산이 뒤덮인다. 그야말로 아트막한 산이 주는‘종합선물세트’인 셈. 꼭 등산화, 등산복이 아니더라도 편안한 차림으로 만날 수 있어 더욱 행복한 산이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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