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온가족이 매일 보았다. 펄펄 눈이 내리던 겨울날, 아버지를 따라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아버지 친구집에서 들고 온 중고 TV가 방안을 차지하고 부터였다. 우리집에 매일 놀러온 옆방 아줌마는 그 전에는 <여로>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때는 이거보다 더 했다고 했다. 그 아줌마네는 TV가 없었다.

드라마는 달동네 얘기였다. 조그만 마당을 가진 ㄷ자형 가옥에 한방에 한 가족씩 살면서, 방이 세 개면 세 가족, 방이 다섯 개면 다섯 가족이 한지붕 아래 한가족 처럼 어울리며 사는 동네 얘기였다. 그 사람들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모두 서울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서울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고 서울에서 만난 다른 고향의 사람들과 한 지붕 아래 한가족처럼 살을 맞대고 부대끼며 살았다. 우리 동네가 그랬고 우리 집도 그랬다. 어른들은 매일매일 똑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드라마에 울고 웃었다. 몇 달 전에 물난리가 나서 살림들을 다 물에 쓸려보내놓고서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의 집 궁색한 살림살이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에 빠지게 만든 곰례

똑순이가 나오는 게 <야, 곰례야>인가 <달동네>인가……. 너무 어릴 때이고 오래돼서인지 아니면 똑같은 작가에 비슷한 설정과 인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두 드라마가 지금은 잘 구분이 안되지만 내게는 두 드라마를 구분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이 있다. 그건 정윤희가 나오느냐 아니냐이다. 정윤희가 곰례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윤희와 곰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한 쌍이었다. 그건 전지현보고 신봉선이 되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정윤희가 아닌 곰례를 나는 상상 할 수 없다. 나에게는 정윤희가 곰례고 곰례를 통해서 처음 정윤희를 만났다. 나에게는 이리역 기차폭발사고로 엄지발가락을 잃었다는 전주 사는 점례 고모와 점례고모의 친구 분례누나도 있었다. 곰례는 예쁘고 착했으며 무엇보다 맑고 슬픈 눈을 가졌다. 곰례는 내가 사랑하면 안 될 친척누나였고 어린 나는 자꾸만 금지된 사랑에 빠졌다. 곰례는 결국 서울사람이 되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내게 돌아왔다. 내가 <고교생일기>의 조용원 누나를 한창 좋아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몰려간 동시상영 극장에 곰례가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을 하고 속옷차림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슴이 보일락 말락했고 아이들이 킥킥대며 좋아했다. 고향 가서 잘 살겠다고 내려간 곰례는 호스티스가 돼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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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enes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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